유기는 놋그릇이라 하여 20세기초만 하더라도 집집마다 그릇 · 대야 · 제기(祭器) 등으로 널리 쓰였으나 일제 말기 포탄으로 쓴다고 하여 공출된 후 거의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 있던 것도 30여 년 전 땔감으로 연탄을 쓰자 여기서 나오는 아황산가스로 그릇이 까맣게 변하고 때맞추어 값싼 스테인리스, 플라스틱 식기가 등장하자 완전히 사라져 지금은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놋그릇의 원소재인 놋쇠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이 주종을 이루며, 여기에는 주석이 10∼20% 첨가되어 있고 이런 청동은 겉빛이 노르스름하다 하여 ‘놋쇠’라고 불렸다.

1834년에 간행된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에는 ‘향동(청동)은 우리 나라의 놋쇠이다. 놋쇠 1근을 만들려면 구리 1근에 주석 4냥을 넣는다’라고 하였다. 이 조성은 Cu - 20%Sn 청동 합금이다. 향동(響銅)을 유철(鍮鐵)이라고도 부른다.

한편 『격고요론』(格古要論)에는 ‘최방(崔昉)이 말하기를 구리 1근과 노감석(爐甘石) 1근을 녹이면 유석(鍮石)이 된다’라고 하였다. 노감석은 아연광으로서 이에 따르면 이 합금은 구리 - 아연 합금으로서 지금의 황동(黃銅)을 가리킨다. 값싼 장식품 따위는 황동을 쓰는 경우가 있으나 식기 · 제기나 악기 등은 대부분 지금도 청동을 쓰고 있다.

유기의 기원은 멀리 기원전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수저 등이 출토되는 것을 보아 삼국시대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수저나 그릇이 출토되었으며 고려시대의 놋그릇은 동 1근에 2∼4냥4돈의 주석을 넣은 것이다. 이것은 곧 주석이 11∼22% 함유된 것을 뜻한다. 이때는 주로 주조와 절삭가공법으로 유기를 만들었고 타모법이 있기는 하였으나 초벌타모에 그쳤다.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는 주석의 함량이 규격화되었다. 17세기에는 개성과 안성에서 유기 공업이 성행하였고, 19세기에는 여러 곳에서 유기를 제조하였으나 특히 경기도 안성과 평안북도 정주군 납청(마산면 청정동)이 유명하였다. 당시 경기의 안성에서는 놋그릇을 해마다 60만 개나 생산하였는데 이는 하루에 약 2,000개의 그릇을 만든 것이 되니 얼마나 널리 유기가 보급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납청의 놋점들은 유기 제품 생산으로 1년에 180∼240톤의 놋쇠를 소비하였다고 한다.

유기를 제조하는 방법으로 주조법과 단조법이 있었다. 주조해서 만드는 곳을 ‘퉁점’, 여기서 생산되는 주물을 ‘붓배기’(경기 안성)라 하고, 놋그릇을 단조하여 만드는 곳을 ‘놋점’, 여기서 만든 단조품을 ‘방자’(평북 납청 일대)라 한다. 퉁점에는 6∼7명의 기술자가 있었고, 놋점에는 책임자 외에 11명의 기술자들이 한 조가 되어 일을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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