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유기 생산지로 전해오는 경북 봉화읍
삼계리 유기마을을 찾았을 때 유기장 고해룡(무형문화재 제22호)
선생님은 쉬이 데워지고 이내 식어비로고마는 요즘 세상에 할말이 많았다.
그이에게 있어 놋그릇은 부러진 백년동안을 함께 해온 그의 전부요,
온통 세상인 것이다.

그 신비스런 움색에는 옛 사람들의 어진 말씀이 있었고, 번쩍이는 광채가 가신 뒤에
비로소 발하는 은은한 빛은 그리운 어머니의 품속이었다. 그리고 분명
그 안에는 참을성 없는 우리들의 오늘을 추스르게 해 줄 깊은 인내와 지혜가 있었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상류층의 식기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기그릇과 함께 우리의 그릇문화를 대표해왔다.

더욱이 고해룡선생님의 고향 봉화는 5백년 전부터 관가에서 유기를 제작하였으며 민가에까지 퍼지기 시작하여 한때 고을 전체가 놋점거리를 형성하였고(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적고 있다. 또한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조.선조 순조 30년(1830)경 곽씨 성과 맹씨성을 가진 두 사람이 이곳 삼계리에 정착, 유기를 제작하면서 크게 번성하자 이 일대에 유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어 "새롭게 번성하는 마을"이라 뜻의 신흥리(新興里)가 되었다고 한다. 전국 수요의 70%를 차지할 만큼 번창하였으며 '안성맞춤'인 안성유기에도 영향을 미친 한국 유기제조의 발상지인 것이다.

유기장 고행룡 선생님의 아버지는 신흥리가 유기제작으로 전국에 명성을 날리던, 물건이 없어 못 팔던 시절에 유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고해룡 선생님은 어린시절 어느날, 놋점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버지가 하는 그 일을 보고 말았다. 달궈진 화덕에서 녹은 쇳물이 어느새 그릇 모양이 되어버리는 신기한 일을..

"암만해도 그거는 시뻘겋게 속을 내비치는 불덩이였더니, 고마 해를 녹여내는 줄 았았쟎니껴. 참만로 새벽녘에 하늘로 치솟는 해가 녹아 내리만 그리 붉을란지...." 어린 그이가 보아버린 그 날의 광경은 그이의 운명을 정해 버렸다. 그 이후로 아버지 몰래 놋점에 들어가 쇠를 녹이는 것이 놀이가 되었다.

"아버지한테 들키고 숱테 맞았더니, 맨날 각서 쓰고, 그런데 그란다고 되니껴, 나는 학교도 가기 싫고 날만새만 그기 하고 싶은걸."

아버지 자신에게는 업이라 받아들였던 일이지만 자식에게는 쇳가루를 뒤집어쓰는 험한 일을 죽어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무모 없더더니 14살 되던 해에 결국에는 아버지로부터 놋점에 드나들 자유를 얻어냈다. 기어이 놋갓장이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때가 좋았다. 놋점은 주문이 밀려 밤새 쇳물을 녹여 빛나는 유기를 쏟아내고, 아버지로부터 정식으로 유기 만드는 기술을 배우며 맘껏 놋점을 누빌 수 있었던 시절, 인생을 돌아볼 때 그이에게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제일로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1919년 산림벌채금지조치가 내려지고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전쟁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전국의 놋그릇을 징발해가면서 사실상 금지되었다가 해방과 더불어 활기를 되찾았던 유기가 이제는 6·25 이후 연탄을 사용하면서 연탄가스에 녹이 슬어버리자 식기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 것이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가고 있었다.

그 무렵 그이는 군대를 갔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이 왔다. 놋그릇의 운명처럼 그이의 운명도 그렇게 기울어 갔다. 편리한 스테인레스와 알루미늄 그릇이 들어왔고 더 이상 놋그릇은 집안에 머물지 못하고 고물상으로 자리를 옮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도 놋그릇에 눈길을 주는 이는 없었다.

삼계리 놋점거리의 놋갓장이들도 모두 떠나가고 마지막 남은 그이마저 아버지의 놋점에 빗장을 채웠다. 이제 10남매의 맏이, 그 힘겨운 자리만이 남아 있을 뿐 어디에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살 길을 찾아 나서야 했다. 늙으신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고서 동생들을 데리고 그렇게 고향을 떠나왔다.

다행히 서울로 상경하여 유기를 수출하는 동아공예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래도 유기을을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처음 마음은 그랬더니, 그런데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놋그릇만 모면 자물통이 채워진 놋점을 혼자 지키고 있을 어머니가 눈에 밝혀 몸서리가 났니더."

그렇게 12년을 견뎌낼 즈음 어머니마저 외롭게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더는 저버릴 수가 없었다. 텅빈 집으로 돌아와 굳게 닫힌 놋점의 빗장을 열었다.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던 놋그릇이 그저 편리하고 때깔 좋은 서양그릇에 등떠밀려 잊혀져 가고 있는 세상에서 유기의 숨결을 되살려야 했다. 온 마음을 다해 풀무질을 했다. 그이가 봉화를 떠나면서 한동안 끊어졌던 봉화 유기의 맥이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유기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된다.

불에 녹인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서 만드는 주물유기와 합금된 놋쇠를 달구어 메질(망치질)을 되풀이해서 얇게 늘여가며 형태를 잡는 방짜유기. 주물로 된 기형의 끝을 불어 달구어 오목한 형태로 만드는 반방짜유기가 있다.

먼저 인천 송도 바닷가에서 조수가 교차될 때 가라앉는 앙금 같은 흙을 파와서 햇볕에 말린 다음 채로 곱게 친다. 여기에 장을 담그듯이 흙 1되에 소금 1홉을 넣고 간수러리를 한다. 소금을 넣는 이유는 흙이 보드라우면서도 힘이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갯토가 준비되면 화덕에 숯이나 석탄을 넣어 불을 붙이고 풀무질을 한다. 화덕 속에 구리(16냥)와 상납(4냥 5돈)을 담은 도가니를 넣고 쇠를 녹인다.

쇳물이 준비되는 동안 쇳물이 들어갈 번기의 형태를 만든다. 갯판(작업대) 위에 그릇의 형태인 번기를 엎어 놓고 갯토와 그릇 사이가 달라붙지 않게 송탄가루를 뿌린다. 그 위헤 틀을 덮고 갯토를 넣어 다진다. 갈구대(갯토방망이)로 갯토를 골고루 넣은 다음 표면을 잘 다듬어 번기가 갯토에서 잘 빠지게 모지래로 번기 주변에 물칠을 한다. 다시 엎어 번기를 살짝 들어 올리면 만들고자 하는 틀(암틀)이 된다.
이 암틀의 한쪽에 무집이라 하여 쇳물이 들어가는 길을 만든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법으로 수틀을 만든다.

이렇게 준비된 암틀과 수틀을 따로따로 놓고 그을음을 한다. 예전에는 관솔로 했으나 요즘은 경유를 칠한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쇳물이 잘 스며들고 단단하게 하기 위해 그을음질을 한다. 그리고 나서 암틀에 수틀을 밀어 넣어 움직이지 않게 밀착시키면 번기틀이 완성된다.이젯 쇳물이 끊어 붉은 빛에서 흰빛을 띠면 유구(주등이)를 통해 쇳물을 붓는다. 그러면 쇳물은 순식간에 무집을 따라 암틀과 수틀 사이의 틈새로 들어가 만들고자 하는 기형이 된다. 그리고 나서 향남틀을 갯판 위에 놓고 분리시키면 유기가 되는 것이다.

만들어진 유기를 가질간에서 밝은 색채가 나올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하여 다듬는다. 이때 기물에 따라 조각이나 문양 등의 섬세한 장식을 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광간에서 광을 내면 유기가 완성된다.

옛날에는 우리네 여인들이 기왓장을 가루내어 볏짚으로 힘겹게 얼룩을 닦으며 삶의 해완을 함께 닦아 내던 놋그릇. 고해룡 선생님은 이제 다시금 놋그릇이 우리의 생활 한가운데로 돌아와 가슴과 따뜻한 정취를 전해줄 때가 올 것을 믿고 있었다.

"당장에는 편한 기 제일인 줄 알지만 그기 다가 아니더니. 내가 한사코 유기를 붙들고 있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깁니더. 살아보마 멀리를 봐서 지줌(저마다) 감당해내야 할 일도 있다는 걸 알깁니더. 세상에 거저되는 것 아무것도 없쟎니껴. 한번 가만 다시 안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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